교동으로의 이주와 정착  경주 교촌 최부자의 고택은 신라시대 요석공주가 머물렀던 요석궁터다. 고택의 우측으로는 김유신 장군이 살았던 재매정이 있고 좌측 옆에는 향교와 사마소(司馬所)가 자리하고 있으며 그 앞으로 문천에 월정교가 걸쳐져 있다.   월정교는 원효대사가 옷자락을 적셔 요석공주를 만나 사랑을 꽃피운 곳이고 두 사람 사이에서 설총이 태어난 곳이므로 그야말로 유서 깊은 곳이다.   최부자댁이 내남면 이조리에 살다 교동으로 이주를 결심한 인물은 7代 최언경(1743~1804)이다. 그곳에서 이미 만석에 가까운 부를 이룬 최언경은 점점 더 많아지는 재산을 그곳에서 관리하기에 집이 협소하고 늘어나는 과객들을 유치하기에도 불편했다.   여기에 문중재산관리로 집안이 시끄러웠고 친척과 주위사람들은 최부자댁의 재산에 대한 질투까지 생겨나 종가의 입지가 위축되어지는 상황에 이르자 새로운 가거지를 찾기 시작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는 지관과 함께 경주뿐 아니라 전국을 답사하면서 3곳의 후보지를 찾아냈다. 첫째는 수원 팔달산 아래였는데 이곳은 한양과 가깝고 넓은 옥토와 물산도 풍부하여 관계로 진출할 인물이 날 명당이었다.   두 번째로는 현재의 교동인데 마을로 이어지는 내룡이 다소 약했으나 특히 앞쪽의 안대가 좋고 득수가 뛰어난 곳이었다.   세 번째는 경상도 영양의 입암 이었는데 태백산의 끝자락이 동(東)을 막아주고 소백산 자락이 서(西)를 막아주며 남(南)으로는 주왕산이 안산으로 있고 그 가운데로 낙동강의 지류가 흘러 전형적인 장풍득수의 표본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주위에 너무 큰 산들이 좌우로 늘어서 있다 보니 압충을 받아 사람이 살기에는 다소 풍파가 따를 수 있는 곳이었다.  최언경은 아들 최기영과 상의하여 세 곳 중에서 이조리에서 그리 멀지 않는 교동에 이주하기로 결정하고 요석공주 궁터와 일대 야산을 매입했다.   그러나 막상 교촌으로 입향 할려니 유림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이유는 교촌은 향교가 있는 곳으로 그 곁에 부잣집의 큰 저택이 들어서는 것은 여러 가지로 어울리지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최기영은 집을 지을 때 지반을 낮추어 용마루의 높이를 향교의 용마루 높이보다 다섯 자(1m 50cm) 낮추기로 하고 미곡 1천석을 유림의 기금으로 희사하는 조건으로 간신히 허락을 받을 수가 있었다.   그런 후 이조리에서 살던 집을 해체하여 그 재목(材木)으로 현재의 교동고택을 지어 이사를 오게 되었다. 당시 부호들은 주로 아흔아홉 칸의 집을 지었지만 주위의 비난을 염려해 열 칸이 빠진 여든 아홉 칸의 집을 지음으로서 겸양의 모습을 보였다.   이후 후손들은 점차 교촌 큰집의 앞쪽으로 분가하면서 현재와 같은 규모로 교촌에 최씨일가를 이루게 되었다. 이것은 종손의 집 바로 뒤쪽에 후손들의 집을 지으면 풍수적으로 볼 때 큰집으로 들어오는 입수맥을 누르게 되어 자손들의 번창을 막는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는 음택에서 역장을 하지 않듯이 조상의 묘지 뒤쪽에 아랫사람의 묘를 쓰지 않는 원리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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